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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빛과 어둠, 오펜하이머와 원자폭탄

글 / 강준혁 학생기자 lawbrighter@kaist.ac.kr, 최건 학생기자 choiriley2004@kaist.ac.kr, 홍준만 학생기자 godwin3232@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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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은 닐스 보어, 엔리코 페르미, 존 폰 노이만, 리처드 파인만 등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들을 비밀리에 불러 모았다. 독일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막이 오른 순간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자그마치 20억 달러를 쏟아붓고, 13만 명의 과학기술자가 참여한 초거대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끈 리더가 바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였다. 오펜하이머, 그는 원자폭탄으로 세상에 어떤 바람을 불러왔을까.

오펜하이머, 그는 누구인가

오펜하이머는 1904년 4월 22일 미국 뉴욕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부유하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오펜하이머는 다재다능한 학생으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고, 영어와 프랑스어를 비롯한 여러 외국어에도 능통했다. 그의 언어 능력은 훗날 그가 다양한 국가 출신의 과학자들과 협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버드대에서 화학을 전공했지만, 물리학에 더 관심을 갖게 된 오펜하이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를 거쳐 독일 괴팅겐대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독일은 이론물리학의 중심지였기에 오펜하이머는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들과 연구를 함께할 수 있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오펜하이머는 캘리포니아공과대와 UC버클리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레슬리 그로브스 대령(왼쪽)과 오펜하이머(오른쪽). ⓒwikimedia

레슬리 그로브스 대령(왼쪽)과 오펜하이머(오른쪽). ⓒwikimedia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다

오펜하이머는 천문학, 핵물리학, 양자역학 등 물리학의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유능한 과학자였다. 하지만 38세의 젊은 나이와 그의 경력을 고려했을 때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끄는 책임자가 되기에는 부족했다. 관리직이나 규모가 큰 연구소를 이끌어본 경험도 없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맨해튼 프로젝트의 리더가 될 수 있었을까?

그를 발탁한 사람은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괄을 맡았던 미국 육군 레슬리 그로브스 대령이다. 그로브스 대령은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는 오펜하이머의 능력을 높게 평가했다. 그의 평가는 정확했는데, 오펜하이머는 타고난 리더였다. 그는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을 불러 모아 적재적소에 인력을 투입하며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해 나갔다. 마침내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의 폭격실험장에 버섯구름이 선명하게 솟아올랐다. 오펜하이머를 포함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자들이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 것이다. 폭발로 격동하는 실험장에서 원자폭탄의 성공을 지켜본 오펜하이머는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라는 말을 남겼다.

1946년 7월 16일, 최초의 원자폭탄 폭발 실험이 성공했다. ⓒwikimedia

1946년 7월 16일, 최초의 원자폭탄 폭발 실험이 성공했다. ⓒwikimedia

그리고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리틀 보이(Little Boy)’라는 이름의 원자폭탄이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당시 히로시마는 군수품 공장과 일본군 주둔지가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원자폭탄 투하로 히로시마에서 14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일본이 곧바로 항복하지 않자, 미국은 3일 뒤인 8월 9일 11시 2분 ‘팻맨(Fat Man)’이라는 이름의 두 번째 원자폭탄을 일본의 나가사키에 투하했다. 나가사키에서는 7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일본은 8월 15일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다.

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모습. ⓒwikimedia

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모습. ⓒwikimedia

[가상인터뷰]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의 고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오펜하이머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로 불리며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 인류에게 주었던 것처럼,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해 미국에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정작 오펜하이머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핵무기의 참상을 보고 큰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에게 “제 손에 피가 묻어 있는 것 같습니다(I feel I have blood on my hands).”라고 말하기도 했다. <KAIST비전> 기자들은 오펜하이머와의 가상인터뷰를 통해 핵무기가 가진 위험성에 대한 그의 우려와 핵무기를 개발하며 느꼈던 윤리적 고뇌를 보여주고자 한다. 이는 영화 <오펜하이머>나 그의 평전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출처 ⓒ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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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나요?

저를 포함해 이 프로젝트에 투입된 과학자들은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과학자들이 모였다고 하더라도 한정된 시간과 자원으로 성과를 내야 했기에 압박이 컸습니다. 특히 원자폭탄의 핵심 원리인 핵분열 연쇄 반응은 당시 막 발견된 반응이었습니다. 이를 응용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무기를 몇 년 안에 만들어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죠. 실험 데이터를 빠르게 수집하고 해석해 적용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원자폭탄의 위험성과 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Q. 원자폭탄에 대한 윤리적인 고민은 어떤 것이었나요?

초기에는 독일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습니다. 기나긴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국가적인 의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만들고 있는 무기가 얼마나 파괴적인지 깨달았고, 잠재적으로 인류에 미칠 영향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되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전쟁에서 보호의 수단으로만 사용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힘이었기 때문입니다.

Q. 원자폭탄 폭발 실험인 ‘트리니티 실험’에서 폭발을 지켜보던 순간, 어떤 감정을 느끼셨나요?

트리니티 실험의 성공 순간,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들이닥쳤습니다. 처음에는 긴 시간 매진한 연구를 성공으로 이끈 것이 기뻤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파멸적인 힘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책임감과 공포, 불안함이 저를 짓눌렀습니다.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 직접 보고 느끼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으니까요. 앞으로의 세상이 예전과는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원자폭탄의 파괴력을 본 과학자들은 이를 실제로 투하하는 것에 크게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 또한 원자폭탄의 투하를 반대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저는 핵무기의 사용과 수소폭탄 개발에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출처 ⓒ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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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 이후, 핵무기 확산을 막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

오펜하이머의 예상대로, 원자폭탄은 인류를 이전과는 다른 세상에 살도록 만들었다. 원자폭탄의 위력을 목도한 강대국들은 너도나도 원자폭탄 개발에 매진했다. 소련과 프랑스, 중국, 영국이 미국의 뒤를 이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다. 하지만 군비경쟁은 공멸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었다.

국제사회는 뒤늦게야 핵무기 확산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핵의 확산을 막고 원자력 기술을 평화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부랴부랴 논의를 시작했다. 1967년 미국과 소련이 기본적인 합의를 진행했으며, 이듬해 6월 UN 총회에서 핵확산금지조약(NPT)이 채택되어 1970년 발효됐다.

NPT는 핵의 비확산, 핵무기 군비 축소, 원자력 기술의 평화적 이용의 세 가지 내용이 핵심이다. 먼저 한국처럼 아직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국가가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하도록 억제한다. 그리고 가입국들은 핵무기 경쟁을 하지 않고, 핵무장 해제를 위해 협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원자력 기술은 원자력발전소 등의 평화적인 목적으로만 이용해야 한다. 현재 인도와 파키스탄, 이스라엘, 남수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가 NPT 회원국이다. 한국은 1975년에 가입했다.

한계와 비판이 있지만, NPT는 핵비확산의 핵심

NPT 발효 이후, 인류는 핵무기의 위험에서 벗어났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않다. 지난 50여 년간 NPT가 핵무기 확산을 억제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핵을 보유한 국가들을 인정하고 핵을 보유하지 않은 국가들의 핵무장만을 막는 조약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불평등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핵보유국에게 주어진 임무는 점진적으로 핵무기를 감축하는 것이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목표 시한이 정해져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지난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핵전력을 강화했지만, NPT에는 이를 저지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강제성이 없다는 것도 NPT의 한계로 지적된다. NPT는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조약이므로, 조약을 어긴다고 하더라도 큰 처벌을 받지 않는다. 인도와 파키스탄 등의 일부 국가는 여전히 NPT 참여를 거부하며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고, 북한은 2003년 NPT에서 탈퇴하며 여러 차례 핵실험을 단행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NPT는 여전히 핵무기 확산을 억제하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 일부 국가들만이 문제일 뿐, 대다수의 핵 비보유국들은 NPT를 충실히 따르며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고 원자력 기술을 평화적인 곳에만 이용하고 있다. 강제성이 없다고 하지만, 혹여라도 조약을 무시하고 핵무기를 개발하는 국가가 있다면 국제사회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되며 경제적 제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21년부터는 NPT에서 더 나아간 핵무기금지조약(TPNW)이 발효됐다. TPNW는 모든 핵무기의 개발과 실험, 보유, 사용을 금지하는 국제조약이다.

국제사회의 핵비확산 노력에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최근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으며 위험한 정세가 지속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원자폭탄이 1945년 8월 이후로 더 이상 사용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핵무기의 사용은 인류의 절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모두가 책임감을 갖고 핵비확산을 위해 노력해나가야 한다.

[인터뷰] 원자력 기술의 영향을 끊임없이 고민하다 KAIST 핵비확산교육연구센터장 임만성 교수

KAIST 핵비확산교육연구센터(NEREC)는 핵비확산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국내 유일의 대학 기관이다. 2014년 설립된 이후, 핵비확산을 위해 노력할 미래 세대를 양성하고 있다. NEREC의 센터장을 맡고 있는 임만성 KAIST 원자력및양자공학과 교수를 만나 핵비확산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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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원자력공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가 있는가?

어렸을 때는 슈바이처 같은 의사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어느 날, 신문에서 한국에도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된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보자마자 ‘멋있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직감적으로 ‘이걸 하고 싶다’고 느꼈다. 그길로 학사와 석사, 박사과정까지 원자력공학을 공부했다.

Q.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오펜하이머의 삶이 안타까웠다. 오펜하이머와 비슷한 상황에 있던 독일의 물리학자가 있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나치에 충성했고 핵무기 개발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지도 못했는데, 전쟁 이후 그는 영웅으로 칭송받으며 지금까지도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로 유명하다. 그에 비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오펜하이머는 남은 생 내내 자신이 개발한 무기가 인간의 목숨을 해치는 데 이용된 것에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했다. 어쩌면 하이젠베르크보다 더한 천재였을지도 모르는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 개발이 아닌 물리학에 매진했다면, 그는 엄청난 물리학적 업적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Q. 현재 원자력공학보다 핵비확산 분야에서 더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나?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핵비확산과 관련된 일을 하는 독일인을 만났다. 독일에서는 원자력 기술을 ‘악한 기술’로 표현한다는 말을 듣고 인상 깊었다. 독일인들은 원자폭탄을 만드는 직접적인 동기를 제공했고, 문화적으로도 원죄 의식이 있기에 그렇게 표현한다고 한다. 그가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에 원자력발전소를 많이 짓는 게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일까?”라고 질문했는데, 그때의 나는 이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과연 우리는 뭘 위해 이것을 연구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며 순간 멍해졌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이 질문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고, 어느 순간 원자력을 연구하는 것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원자력 기술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어떤 영향을 끼쳐야 할지에 대한 대답을 찾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다. 그래서 KAIST NEREC에도 내가 겪은 고뇌와 느낀 점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Q.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는가? 그 답을 찾아온 과정이 궁금하다.

대학원에서 환경보건학을 연구하며 원자력이 안전하고 책임감 있는 기술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석사과정에서 다양한 에너지원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했는데, 다른 에너지원과 비교했을 때 원자력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나름의 답을 얻었다. 이후 정책대학원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큰 전환점을 얻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끈 과학자들은 이미 원자력의 규제와 관리 분야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자신들의 뒤를 이을 차세대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것이 프로그램의 취지였다. 이를 계기로 원자력 연구와 더불어 국제 정책 분야의 연구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다. 이후 수많은 고뇌를 해왔지만, 여전히 이상적인 해답을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끝없이 생각하고 더 나은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이 이 분야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Q. KAIST NEREC은 어떤 곳인가?

NEREC이 설립된 계기부터 설명하고 싶다. 2012년 서울에서 핵안보 정상회의가 열렸는데, 당시 나는 이 회의의 자문위원을 맡았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과 원자력 협정을 개정할 때도 자문위원으로 초청을 받았다. 핵농축, 핵 재처리 기술 등 핵무기와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민감한 기술들을 들여오고자 했는데, 미국에서 핵비확산에 대한 국가센터를 짓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당시에는 한국에 핵비확산이라는 개념이 문화적으로도, 제도적으로도 미숙했기에 올바른 방식으로 핵무기와 원자력 기술 관련 연구가 정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KAIST에 NEREC이 설립됐고, 현재는 원자력에 관한 여러 연구를 진행하면서도 원자력이 가진 영향력을 바탕으로 원자력의 가장 안전하고 평화적인 사용법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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